공기업이 지닌 ‘구매력’은 단순히 장부에 찍히는 숫자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방향을 바꾸는 거대한 지렛대다. 국민의 세금과 공공요금으로 조성된 예산이 어디에, 어떻게 쓰이느냐에 따라 경제의 모세혈관이 건강해질 수도, 고통을 겪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시장 진입 장벽이 높아 스스로 안정적인 판로를 확보하기 어려운 중증장애인생산품의 경우, 공공부문이 ‘첫 구매자’가 되어 제품과 서비스의 품질을 검증해 주지 않으면 민간 시장에서 살아남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공기업이 앞장서서 온기를 불어넣으면, 뒤이어 민간 수요가 따라붙고 생태계 전체가 활력을 얻는다. 이것이 공기업이 ‘따뜻한 구매’를 통해 사회적 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이유이자, 상생 경영이 선택이 아니라 책무인 이유다.

이 중요한 원칙을 몸소 보여 주는 대표 사례가 바로 서울교통공사다. 서울교통공사는 지난해 중소기업 제품 4,978억 원어치와 중증장애인생산품 56억 원어치를 조달해 전국 164개 지방공기업 가운데 단연 1위의 실적을 기록했다. 특히 중증장애인생산품 구매액은 불과 1년 전 19억 원에 머물던 것이 세 배 가까이 뛰어올랐고, 전체 구매액에서 중소기업 제품이 차지하는 비중도 87%에 달해 법정 목표인 50%를 가볍게 넘어섰다. 이 숫자는 삭막한 회계 항목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 기업과 중소기업에 건네는 신뢰 계약서이자, “공공 구매는 단순 거래가 아니라 동반 성장을 위한 투자”라는 백호 사장의 철학이 구체적인 성과로 꽃핀 결과다.

서울교통공사는 ‘동반성장 공공구매 계획’이라는 전사적 로드맵을 중심축 삼아, 예산을 증액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판로 개척·품질 개선·재투자가 끊임없이 순환하도록 설계했다. 먼저 장애인표준사업장이나 사회적기업과 주기적으로 소통하는 상담창구를 열어 현장의 목소리를 실시간으로 경영 현장에 반영했고, 대규모 계약을 단순 일회성 수의계약에 머물리지 않고 다년 계약 형태로 묶어 안정적 매출을 보장했다. 동시에 공동 연구개발(R&D)을 통해 제품 고도화를 지원함으로써, ‘값싼 의무 구매’라는 편견을 깨고 ‘경쟁력 있는 혁신 제품’으로 격을 끌어올렸다. 이는 공기업이 ‘최저가 낙찰’에 매몰돼 공급업체를 소모품처럼 다루던 과거 관행을 넘어선 진화형 모델로 평가받는다.

서울교통공사의 실적은 경제·사회·환경 세 축에서 고르게 파급 효과를 만든다. 경제적으로는 매년 수천억 원 규모의 안정적 수요가 중소기업과 사회적기업의 매출을 떠받치고, 이는 고용 창출과 지방세수 확대로 이어져 지역경제를 도톰하게 만든다. 사회적으로는 장애인 근로자의 고용이 유지·확대되고, 이들이 작업 현장에서 쌓은 경험이 자립 기반으로 이어져 복지 비용을 줄이는 선순환을 낳는다. 환경·ESG 측면에서도 국산 친환경·친사회적 제품이 우선 채택되면서 공공·민간 전반에 ESG 경영이 자연스럽게 확산된다. 결국 ‘상생 경영’이라는 말이 허공에 떠도는 구호가 아니라, 공기업 한 곳의 결단이 실제로 숫자와 삶을 바꾸는 구체적 해법임이 증명된 셈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성공 방정식은 어떻게 확산될 수 있을까. 첫째, 정부 차원의 가이드라인을 조금만 상향 조정해도 파급력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진다. 예컨대 산업통상자원부나 행정안전부가 중증장애인생산품 구매율을 ‘전체 구매액의 1% 이상’ 같은 구체적인 수치로 명문화해 공기업 경영평가 항목에 반영하면, 전국 공기업·지방공기업이 따라야 할 명확한 로드맵이 생긴다. 둘째, 성과 공유 플랫폼 구축이 중요하다. 서울교통공사가 만든 계약 서식, 품질 인증 체크리스트, 위험관리 매뉴얼 등을 다른 기관이 편리하게 열람·벤치마킹할 수 있는 온라인 허브를 마련하면, 후발 기관들은 시행착오를 줄이고 즉시 실행에 옮길 수 있다. 셋째, 민간 확산을 촉진하는 인센티브 설계가 필요하다. 공기업이 육성한 사회적기업 제품을 도입하는 민간기업에 세액 공제나 ESG 평가 가점을 부여한다면, 공공구매로 시작된 온기가 시장 전체로 넓게 퍼져 나갈 것이다.

결국 서울교통공사가 보여 준 ‘따뜻한 구매’의 핵심은 “구매력도 공공서비스”라는 사실을 명징하게 드러낸 데 있다. 장애인 근로자가 만든 제품이 지하철 역사 곳곳에서 시민을 맞아들이고, 중소기업이 공급한 친환경 기자재가 승객의 안전을 지키며, 이 모든 과정이 ESG 경영 실적으로 이어지는 멋진 선순환. 이것이 바로 공기업이 가진 힘이고, 동시에 책임이다.

이제 다른 공기업과 지방공기업, 나아가 중앙부처와 민간기업이 이 선례를 참고할 차례다. 공기업이 ‘첫 구매자’로서 사회적 약자와 중소기업을 품어 안으면, 우리는 누구도 뒤처지지 않는 따뜻한 경제를 향해 한 발 더 다가설 수 있다. 구매 방향의 작은 전환, 조직 KPI의 미세한 조정, 그리고 “우리는 함께 성장한다”는 신념—이 세 가지만 갖추면 ‘상생 경영’은 공허한 수사에서 벗어나 눈앞의 현실이 된다. 서울교통공사가 이미 길을 닦았다. 이제 그 길 위에서 더 많은 공기업이, 더 오래, 더 멀리 함께 걸어갈 시간이다. 구매력이 곧 공공의 힘임을 잊지 않는다면, ‘따뜻한 성장’이라는 여정은 결코 멀지 않다.